『씨알 함석헌 평전』은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엮은 고난의 역사서이자, 부끄러운 과거사의 고백록이다. 분단을 중심으로 전반기 생애에 선생은 인류의 평화와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교사로서,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후반 생애에서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분열된 우리의 관념을 물리치고자 했던 투쟁전선이었다. 이 책은 함석헌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면서 연대기적 순서를 바탕으로 삼되, ‘객관적인 역사 사실’의 서술뿐 아니라 선생의 철학적․종교적 심리 변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여 분석한다. 이제 함석헌 선생의 삶과 사상을 들여다보면서 아직까지 분단 이데올로기에 갇혀 사상을 재단하고 인신을 구속하는 등의 냉전주의를 극복해 탈민족주의, 탈근대주의, 탈냉전주의가 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 시대의창 리뷰
“역사가 함석헌, 언론인 함석헌, 사상가 함석헌을 오롯이 관조할 수 있는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 ”
정말이지 한국에선 사상의 자유가 힘든가 보다. 최근 강정구 선생의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건데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것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보다는 힘(국가권력)으로 인신을 구속하려 하고 어쩔 땐 사상 전향마저 강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악법인 국가보안법(개폐의 요구가 있지만)으로 인해 법집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보수언론과 수구세력이 부추기는 측면이 커 보이고, 선거를 의식해 표 모으기 전략이라는 의구심도 있다. 21세기를 산다고 하지만 20세기 국가권력의 폭력이 개인의 사상과 자유를 짓밟고 있는 걸 보면 아직까지 우린 냉전과 근대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지난 20세기 국가권력의 폭력을 극복하고 사상의 자유를 실천하고자 했던 함석헌 선생처럼 어쩌면 강정구 선생은 그 기나긴 ‘고난의 길’을 되짚어 가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마저 든다.
『씨알 함석헌 평전』은 이처럼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함석헌 선생의 긴긴 발걸음을 오롯이 담아낸 20세기 역사서이자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춰낸 고백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함석헌 선생의 출생 시점부터 운명하던 그 순간까지 전체 생애를 일관해서 볼 수 있도록 매우 구체적이고 연대기에 의지해서 시간적, 사건적, 그리고 심리적 변화에 중점을 두고 접근했다. 다시 말해 역사적 관점은 객관적 사실을 기초로 했으며, 선생의 내면 심리 변화에 대해서는 좀더 심층적으로 접근했다. 예를 들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서역사」가 발표되던 전후의 청년 교사 함석헌의 고뇌와 신앙생활을 매우 구체적인 기록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며, 선생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선생에게 영향을 끼쳤던 사상가들(간디, 마치니, 비코, 헤르더 등)의 사상적 견해가 교차하여 함께 어우러진다. 또한 연구자들에게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청년 함석헌의 사회주의에 대한 종교적 관점과 우찌무라의 대속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던 심리적 변화 과정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선생의 위대함과 영웅화를 거부하고 소박하면서도 평범한 인간성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정치적인 사건 중심보다는 그 사건에 임한 선생의 가치관과 마음의 행로에 중점을 두고 서술했다.
그럼 선생의 발자취를 여섯 시기로 나누어 한번 살펴보자.
연한 갈대의 어림(1901~1919) 3.1운동까지
평안북도 용천군 사점에서 출생한 선생은 다섯 살까지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배우고 덕일소학교에 진학해 유년필독, 사민필지, 산술, 역사, 지리 등을 배운다. 학교에 다니던 중 집안 형인 함석규 목사에 의해 기독교 학습교인을 인정받는다. 16살에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나 19살 되던 해 3.1운동이 선생의 인생항로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당시 평양고보를 졸업하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었으나 선생은 의사의 꿈을 버리고 “이 나라 있은 이래 3.1운동에서 더 큰 더 거룩한 일이 무엇이 있겠나”며 스스로 자퇴한다. 이로써 선생의 험난한 ‘고난의 길’은 시작된다.
푸른 갈대의 젊음(1919~1928)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 역사 선생으로 등장하기 전
자퇴한 이후 2년간 “속을 썩힐 대로 썩히면서” 명신소학교 선생과 수리조합의 조합원으로 지냈던 선생은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에 편입한다. 이때 평생 스승 다석 유영모와 사제의 첫 인연을 맺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길을 닦는다. 스승 유영모의 동서양 사상과 당대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습득했던 탓인지 선생은 인생과 역사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자극한 서구의 사상가들을 만난다. 톨스토이, 노자와 장자, 간디, 베르그송, 입센, 블레이크, 타고르, 웰즈, 투르게네프, 괴테, 쉴러, 니체, 칼라일 등을 통해 수줍어하던 겉모습과는 달리 격동하는 시대의 처절함을 온몸으로 떨고 있었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으로 떠난 선생은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인생대학’이라는 감옥생활을 처음으로 겪게 된다. 이 지진을 통해 선생은 정치적 선동에 속았을 때 더없이 어리석은 민중들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고, 동시에 그 민중들이 정치적 미신 속에서 살인자로 돌변시키는 국민국가의 국가주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체험한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시절 평생의 친구이자 교육자였던 김교신을 만나 성서연구회에 참석하고, 우찌무라의 제자가 된다. 선생이 우찌무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이른바 대속 신앙이었다. 이는 인간의 죄는 도덕적 행위로 극복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한다는 것이다. 4년간 선생은 이마이칸의 성서연구회에 다니면서도 스승의 종교관을 뛰어넘는 탈우찌무라의 길과, 세계평화를 꿈꾸는 세계인의 출현을 예고했다. 이 시절 앞서 졸업한 동창생들과 함께 유석동을 발행인으로 하여 6인의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하고 생애 최초로 「먼저 의를 구하라」는 글을 발표한다. 『성서조선』은 창간사에서 『성서』만이 조선을 구할 수 있다며 조선의 교회를 비판하면서 무교회 신앙을 천명한다.
누런 갈대의 일함(1928~1938) 오산학교 선생 시절
일본에서 귀국한 선생은 자신의 모교에서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심정”으로 역사 선생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10년간의 교사 시절은 선생에게 “황금시대”였다. 파란만장했던 긴 생애에 있어 매우 드물게 보이는 평온한 시절이기도 했다. 선생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월급 모두를 책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 수업은 늘 엄격했으며 일본어로 된 교과서에서 일본어를 빼고 한자만 골라 가르치는 등 빼앗긴 나라를 잊지 않고 사랑하는 길을 늘 강조했다. 일부 학생들은 이 시기 선생이 『성서조선』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원형, 이 책에서는 『조선역사』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함께 저자의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를 돌려가며 읽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역사」는 선생이 제2회 동계성서강습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성서조선』에 22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고난의 역사를 짊어진 우리 민족이 결국 세계사에 기여할 것이라는 식민지 현실과 정면 대결하는 역사인식 때문에 일제의 감시에 늘 시달려야 했다. 또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기독교사」「성서적 입장에서 본 교육문제」 등을 연이어 발표해 오산학교 선생 시절은 바야흐로 선생의 역사연구의 산실이 되었다. 선생은 일제의 민족적 굴욕을 강요하는 조선총독부의 교육 방침에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과 함께 결국 교사직을 사임하고 들사람으로 돌아간다.
굽은 갈대의 찾음(1938~1955) 제2차 세계대전, 해방과 분단, 월남, 내전
계속된 동계성서 강습회에서 선생은 「히브리서」(제7회)를 강의하고 「묵시록」(제8회)을 연구 발표한다. 한때 참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평양 송산농사학원(덴마크식 교육기관)을 인수해 종교와 교육과 농사를 창조적으로 일체화시킨 실험을 단행한다. 하지만 송산농학원의 전 주인이던 김두혁이 동경에서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계우회 사건으로 선생은 평양대동경찰서에 투옥된다. 생애 세 번째 옥고였다. 선생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늘 눈엣가시였던 『성서조선』의 김교신, 송두용, 유달영 등을 엮어 『성서조선』지 사건으로 또 한 차례 투옥시킨다. 이때는 식민지 조선 말기인지라 그 어느 때보다도 상당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출옥과 함께 ‘똥통을 멘 채’ 영락없는 농사꾼으로서 날마다 밭에 나갔다. 하지만 농사꾼도 얼마 가지 못했다. 식민지 해방은 선생을 용암포자치위원장, 용천군자치위원장, 평안북도문교부장으로 내몰았으며 또 한 차례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인해 소련군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결국 선생은 지주 땅 몰수 정책으로 전 재산을 잃고 홀로 월남하여 분단시대의 암흑기를 관통하는 역사의 안내원으로 다시 태어난다. 삼팔선을 넘을 때 선생은 북한사람이 아닌 한국인으로, 나아가 세계인으로 살아갈 운명을 직감했다고 한다. 이 시기 선생의 사상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유영모 선생을 모시고 새삼 동양사상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역사를 고처 바라보고 인생을 고쳐 씹고 『성경』을 고쳐 읽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변화는 6.25 이후 「새 시대의 하나님」 「흰 손」 「대선언」 등을 통해 탈우찌무라로 나타났다.
마른 갈대의 깨달음(1956~1980) 『씨알의 소리』 창간 등 역사를 위한 투쟁시기
내적인 목소리를 가다듬은 선생은 이제 분단시대의 들사람으로 등장한다. 『사상계』에「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는가」로 민중의 고난을 방관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일침을 가해 파란을 일으키고 명동 성당 신부 윤형중과 지상 논쟁을 벌인다. 전반기 선생의 생애에서 김교신이 평생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다면 후반기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는 김교신과 같은 존재였다. 『사상계』는 50년대 자유당 독재와 부패를 공격하는 지성의 참호였으며,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투쟁전선이기도 했다. 한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 때문에 국가보안법 혐의로 남한에서 처음 투옥되기도 한다. 4.19혁명을 거쳐 5.16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동안 선생은 자신의 로맨스로 인해 마음의 연옥에 빠지기도 했으며 후반기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을 이 시기에 만난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는 선생을 30년간 민주화운동으로 내몰아 고난의 역사를 이어가는 운명이 되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투쟁(한일협정 반대 투쟁, 반독재 투쟁, 삼선개헌 반대 투쟁, 반유신 개언청원 백만인서명운동, 명동3․1구국선언 등)으로 민중의 지표가 되었다. 70년대 선생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는 한국민중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였다. 두 번의 폐간에도 『씨알의 소리』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인권, 평화, 민족 통일을 제창해 기존 언론들이 하지 못한 언론의 제 기능을 수행했다. 『씨알의 소리』 편집자와 필자들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당대의 유력 지성인들이었다.
꺾인 갈대의 날아 올라감(1980~1989) 자신의 모든 진실을 자신의 최후까지 쏟아 붓던 시기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차 미국에 머물렀던 선생은 10.26으로 급거 귀국하지만 전두환군사정권에 의해 구속당하고 광주민주화운동으로『씨알의 소리』마저 폐간 당한다. 하지만 선생의 가열 찬 투쟁은 멈춤이 없었다. 간디 서거 34주기 추모 강연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두환 정권을 공개 비판했고, 광주항쟁 3주년을 맞이하여 구속인사 석방과 해직교수 복직을 요구하며 단시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싸우는 평화주의자’ 함석헌은 두 번에 걸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터진 정권교체의 열망을 선생은 양김(김영삼, 김대중)에서 찾았으나 이들의 결별로 크게 실망하고 투표마저 포기한다. 결국 선생은 오산고등학교장에게 자기 몸을 학생들의 실험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하고 89년 8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첫째, 분단 이후의 세대가 잘 알지 못하는 20세기 현대사를 선생을 통해 이해하고 올바른 역사관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둘째, 저항적 삶으로 일관한 함석헌의 양심으로 철저하게 부정한 국가권력이 아직까지 정치적 미신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 셋째, 정의롭고, 겸손하고, 깨끗하게 일생을 보낼 수 있었던 함석헌의 삶이 종파심이나 교파심이 아닌 바로 종교적 터전에 기인했다는 사실 때문에 인식 주체인 인간에게 존재 주체인 ‘님’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넷째, 함석헌 선생의 말대로, 역사와 인생은 ‘나’에게 외상이 없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배우고 노력하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처럼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함석헌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함석헌의 인생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난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것은 세속적 욕망이 빚어낸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 따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부모로부터 타고난 착한 품성, 훌륭한 스승의 안내, 참다운 친구의 우정들이 일구어낸 향기로운 정신세계라는 사실이다.
● 지은이: 이치석(李致錫)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현재는 역사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프랑스 Tours대학교 대학원(석사)과 Amiens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D.E.A취득)했다. 논문(불문)으로는「Rapport entre le changement du pouvoir politique et la mentalité collective en Gaule à l'époque Mérovingienne」가 있고, 저서로는 『전쟁과 학교』(문광부추천도서)가 있다.
차례 보기
● 씨알 함석헌 평전
지 은 이 : 이치석
판 형 : 4*6변형(120*188) 양장
면 수 : 664면(+화보 32면)
정 가 : 16,500원
발 행 일 : 2005년 11월 15일
ISBN : 89-5940-013-0 03990
지 은 이 : 이치석
판 형 : 4*6변형(120*188) 양장
면 수 : 664면(+화보 32면)
정 가 : 16,500원
발 행 일 : 2005년 11월 15일
ISBN : 89-5940-013-0 03990